같은 도시를 여러 번 찾는 사람, 공항 표지판만 봐도 설레는 사람, 출발 전에 여행의 피로부터 계산하는 사람. 여행에 돈과 시간을 쓰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낯선 곳에서 일상을 새롭게 느끼고, 누군가는 책으로 읽었던 세계를 만나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을 얻는다.
「쓴만큼」의 첫 시리즈 「근로소비자」는 내가 벌어서 내가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5화의 주제는 ‘휴식을 위한 소비, 여행’. 매거진B 박은성 편집장, 민음사 해외문학팀 유상훈 편집자, 코요태 멤버이자 포토그래퍼인 빽가(백성현)가 좋아하는 여행지부터 짐을 싸는 습관, 호텔을 고르는 기준과 여행지에서 사 오는 물건까지 이야기했다.
영상 속 대화에 박은성·유상훈·빽가의 사전 서면 답변을 더했습니다. 영상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까지 함께 읽을 수 있는 확장 인터뷰입니다.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요
일상이자 비일상이에요. 여행지에서 하는 일도 결국 걷고 먹고 마시고 구경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낯선 환경에 놓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평범한 행위에 더 집중하게 돼요.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비일상적인 감각을 누리고 있다는 걸 새삼 느끼는 거죠. 저는 그 아이러니가 좋아요.
제 지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여행이에요. 방송 때문에 옷을 사는 것 말고는 다른 데 돈을 많이 쓰지 않는 편인데, 여행에는 쓰게 돼요. 여권에 도장이 꽉 차서 새 여권을 만들 때면 인생을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만큼 여러 곳을 다녀왔다는 게 뿌듯하죠.
공부요. 어릴 때 부모님 덕분에 방학마다 해외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어요. 여행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경험한 것이 제게는 큰 공부였죠. 책의 겉표지만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보는 일처럼 느껴져요.
많이 다녀도 여행은 여전히 설레나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설레요. 저는 여행자를 신분보다 상태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곳에 완전히 속한 사람도 아니고,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이잖아요. 일상에서 제가 해야 할 일들이 잠시 유예되는 상태가 좋아요. 같은 거리를 걸어도 출근하는 사람과 여행하는 사람의 마음은 다르니까요.
저는 예전만큼 설레지는 않아요. 여행을 다녀오려면 돈도 많이 들고 에너지도 필요하다는 걸 너무 잘 알거든요. 돌아와 다시 출근할 때 얼마나 힘들지도 미리 생각하게 되고요. 그런 현실적인 걱정이 설렘을 누르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리 예약하고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어요.
저는 언제나 설레요. 비행기를 보거나 공항으로 가는 표지판만 봐도요. 한번은 오후 두 시쯤 갑자기 시간이 나서 항공권을 찾아봤는데, 그날 네 시 사십 분 방콕행 비행기가 있었어요. 바로 표를 사고 몇 분 만에 짐을 챙겨 택시를 탔죠. 호텔도 예약하지 않고 떠나서 혼자 사흘 밤을 보내고 왔어요. 그런 식으로라도 떠날 기회가 있으면 가고 싶어요.
도시와 자연 중 어디를 더 좋아하나요
둘 다 좋아해요. 쇼핑을 하려면 도시에 가고, 캠핑을 하려면 자연으로 가죠. 히말라야나 인도, 네팔처럼 자연을 보러 가는 여행도 해봤어요. 그런데 이제는 호텔에서 쉬는 것도 좋아요. 방콕에 가서 태닝하고 피자 먹고 맥주 마시며 지내는 식으로요. 여행이라고 매번 뭔가 대단한 걸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자연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는데, 결국 도시를 고르는 편이에요. 편의와 사람 구경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어떻게 지내는지 보는 재미가 있고, 필요할 때 원하는 것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편안함도 좋아요.
저도 사람이 만든 문명에 가까운 곳이 좋아요. 대자연도 굉장하지만, 저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성취를 보면 감동과 깨달음을 함께 얻거든요. 편리한 시설이 주는 안정감도 있고요. 일하러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만 여행자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도 도시 여행이 실감 나요.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국내에서는 울릉도요. 친구들과 캠핑하러 갔는데, 바다 색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절벽과 바다가 함께 있는 풍경도 좋았고, 수영하며 놀았던 기억도 좋아요.
해외에서는 포틀랜드를 좋아해요. 가족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다녔어요. 도시에는 멋있는 곳이 많고, 조금만 나가면 숲과 호수, 강과 산이 있죠. 도시와 자연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게 좋아요. 그곳에 가면 제 마음도 차분해져요.
국내에서는 부산이에요. 부산역에서 내려 택시를 탈 때부터 기분이 좋아져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섞여 있고, 그 도시만의 에너지가 느껴져요.
해외에서는 LA를 좋아해요. 가기 전부터 동경했고, 여러 번 다녀온 뒤에도 아직 못 가본 사람처럼 동경하는 곳이에요. 휴대전화 날씨 앱에도 LA를 넣어두고 수시로 봐요. 건조하고 좋은 날씨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기분이 있거든요.
그 도시에서 느끼는 분위기를 저는 ‘가짜 낙관’이라고 불러요. 꿈을 이루려고 모여드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다 떠나거나 외로워지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날씨가 좋고, 무언가 잘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요. 그 복합적인 느낌까지 포함해 계속 마음이 가는 곳이에요.
저도 국내에서는 부산이 좋아요. 대도시와 바다가 함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영도 쪽의 조용한 항구 풍경도 좋고요.
해외에서는 튀르키예 이스탄불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여러 문화와 역사가 겹겹이 쌓인 도시잖아요. 특히 성 소피아 성당에서 거대한 돔을 바라봤을 때의 감격은 아직도 생생해요. 오래전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싶었죠. 인간이 만들어낸 것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이었어요.
같은 곳에 자꾸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방콕에 자주 가요. 맛있는 음식이 많고, 호텔에서 편하게 쉬기도 좋아요. 푹 쉬고 싶을 때 떠올리는 곳이에요. 꼭 매번 새로운 데를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가서 제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아요.
저는 도쿄요. 봐도 봐도 닳지 않는 도시 같아요. 비싼 곳부터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는 곳까지 선택의 폭이 넓고, 각각의 수준에서 잘하는 것이 있어요. 도시 안에 여러 층이 있다고 느껴져요.
동네마다 분위기도 다르고, 같은 지역에서도 공원과 카페, 서점과 상점을 이어서 볼 수 있잖아요. 이미 아는 곳에 다시 가는 재미도 있고요. 한번 다녀왔다고 다 보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곳이라 계속 가게 돼요.
저도 도쿄를 자주 가요. 가깝고 편리한데 경험할 것은 많거든요. 서점에 가거나 일본 출판물을 보는 재미도 크고요. 마루노우치나 도쿄역, 니혼바시 주변처럼 사람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풍경을 보는 것도 좋아요. 꼭 유명한 관광지만 찾아다니지 않아도 도시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이 있어요.
나이가 들어 다시 간 도시는 다르게 보이나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자라는 동안 서울에서 누릴 수 있는 문화적 경험도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어릴 때는 해외에 나가야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이제는 서울에서도 가능해졌어요. 예전에 갔던 해외 도시를 다시 찾으면 도시가 변한 것만큼, 제가 그곳을 바라보는 기준도 변했다는 걸 느껴요.
저에게는 파리가 그래요. 어릴 때 갔을 때와 프랑스 문학을 읽고 공부한 뒤에 갔을 때가 전혀 달랐어요. 사르트르나 보부아르, 카뮈와 뒤라스의 작품을 읽은 뒤에는 그 사람들이 살고 걸었던 장소가 다르게 보이거든요.
같은 도시인데 제가 읽은 것과 살아온 시간이 그 위에 쌓이는 거예요.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는 저에게 파리는 놀이공원 같은 곳이에요. 걷다 보면 새로운 경이를 만나게 되고, 전에 지나쳤던 곳에도 이야기가 생겨요. 여러 번 가도 다시 갈 이유가 있죠.
기대보다 훨씬 좋았던 여행지는 어디였나요
핀란드 헬싱키요. 저는 겨울이 길고 밤이 긴 곳을 좋아하지 않는데, 한겨울에 가게 됐어요. 기대가 크지 않았는데 의외로 아주 좋았어요. 모든 것이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는데, 그 안에 묘하게 괴짜스럽고 귀여운 면이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느낌도 편안했어요. 도시가 위압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각자의 공간을 지켜주는 것 같았죠. 제가 원래 좋아한다고 생각한 조건과는 다른 곳에서도 호감을 느낄 수 있구나 싶었어요.
이탈리아요. 초등학생 때 갔을 때는 덥고 소란스러웠던 기억이 강했어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 여러 지역을 돌면서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대도시가 있는가 하면 고대 로마의 흔적이 있고, 지중해 풍경과 베네치아 같은 수상 도시도 있잖아요. 지역마다 전혀 다른 매력이 있어서 슈퍼 마리오의 여러 세계를 옮겨 다니는 것 같았어요. 음식과 와인도 좋았고요.
키르기스스탄이요. 지인들과 바이크를 빌려 캠핑하러 갔는데, 자연이 정말 엄청났어요. 사막 같은 곳을 지나면 협곡이 나오고, 또 초원과 나무가 나와요. 호수 너머로 눈 덮인 산들이 보이고요. 이동하다가 동물 떼가 길을 막아서 기다리기도 했어요. 그런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하게 되더라고요. 두 번 다녀왔는데 또 가고 싶은 곳이에요.
여행에서는 계획적인 편인가요
평소에는 즉흥적인 사람인데 여행에서는 조금 계획적으로 변해요. 그런데 그 계획을 여행지에 도착해서 세운다는 게 문제예요. 지도에 가고 싶은 곳은 잔뜩 표시해두고 동선은 정하지 않은 채 가거든요. 그러다 밤늦게까지 다음 날 어디를 갈지 고민해요.
보고 싶은 게 많으니까 하나라도 더 보려고 점과 점을 연결하죠. 그렇게 움직이다 보면 강행군이 되기도 해요. 여행 계획도 벼락치기로 하는 셈이에요.
저는 원래 굉장히 계획적이에요. 짐을 쌀 때도 샴푸, 린스, 보디워시를 따로 적고, 양말을 몇 개 가져갈지까지 정해요. 예전에 백패킹을 갔다가 먹을 걸 빠뜨려서 산에서 이틀 동안 고생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더 꼼꼼하게 챙기게 됐어요. 갑자기 방콕에 간 건 예상하지 못한 시간이 났을 때의 이야기고, 보통은 계획을 세워요.
저는 함께 가는 친구가 계획을 세우면 잘 따라가는 편이에요. 대신 따라가면서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으려고 해요. 회사에서도 마감에 쫓기는데 여행에서까지 시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힘들잖아요. 최대한 스트레스 없이 느긋하게 지내고 싶어요. 도시라면 빠뜨린 물건도 현지에서 구할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여행 가방에 꼭 넣는 물건은 무엇인가요
바람막이요. 더운 곳에 가도 비행기 안은 추울 수 있잖아요. 작게 접히고 부피도 크지 않아서 항상 챙겨요.
마그네슘 성분이 든 소금 입욕제를 가져가요. 장거리 비행을 하면 몸이 많이 붓는 편인데, 도착해서 입욕제를 풀고 반신욕한 뒤 쉬는 시간을 좋아해요. 저에게는 다음 날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래서 호텔을 고를 때도 욕조가 있는지 보게 돼요.
예전에는 출국할 때 향수를 하나씩 샀어요. 여행하는 동안 그 향을 쓰면 나중에 같은 향을 맡았을 때 그 여행이 강하게 떠오르거든요. 냄새가 기억을 불러오는 힘이 크잖아요. 다만 여행을 갈 때마다 사다 보니 향수가 너무 많아져서 이제는 그만뒀어요.
저도 그랬어요. 여행지에서 향수를 사서 내내 뿌리면 그때의 기억이 향에 남더라고요. 집에 돌아와서도 향을 맡으면 그곳이 떠올랐어요. 저 역시 너무 많이 사게 돼서 지금은 멈췄지만요.
호텔을 고를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무엇인가요
위치요. 제가 다니려는 곳과 얼마나 가까운지가 중요해요.
저는 전망보다 욕실 상태를 더 중요하게 봐요. 욕실이 널찍하고, 가능하면 욕조가 있으면 좋겠어요. 출장에서는 현지 브랜드 담당자들에게 추천을 받기도 해요. 관광객에게 널리 알려진 곳 말고도 그 지역 사람들이 아는 좋은 호텔이 있거든요.
평소에 정보를 많이 봐두는 편이에요. 여행 직전에 급하게 찾으면 좋은 곳이 잘 안 보일 때가 있어요. 마음에 드는 곳을 지도에 저장해두거나, 출장이 잦은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두면 나중에 도움이 되죠.
가격을 보고, 그 여행에서 무엇을 할지 생각해요. 도시를 돌아다니는 게 목적이라면 접근성이 중요하겠죠. 반대로 호텔에서 쉬려고 가는 여행이라면 수영장이나 시설을 더 자세히 봐요. 실제로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도 보고요. 같은 호텔이라도 어떤 여행을 하려는지에 따라 좋은 선택인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쉬러 간 여행이 다시 일로 이어지기도 하나요
아주 많아요. 상점이 물건을 보여주는 방식, 현지의 작은 브랜드, 잡지와 아트북을 파는 서점, 갤러리가 전시와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까지 모두 업무에 참고할 만한 것이 되죠. 일부러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찾아다닌다기보다 경험한 것이 자연스럽게 쌓였다가 나중에 떠올라요.
휴대전화에도 저나 동행자의 사진보다 참고하려고 찍어둔 사진이 훨씬 많아요. 전시 안내물이나 티켓, 숍카드, 영수증을 넣어주는 봉투 같은 인쇄물도 챙겨오고요. 돌아오면 여행 가방 한쪽에 그런 것들이 쌓여 있어요.
여행 중 서점에서 발견한 책이 실제 출간으로 이어진 적이 있어요. 매거진B에서 츠타야를 소개한 걸 보고 관심이 생겨서 서점에 갔는데, 대표 마스다 무네아키의 『지적자본론』을 발견했어요. 읽어보니 그 기업이 생각하는 가치와 방향이 너무 좋더라고요.
휴가 중인데도 회사에 연락해서 계약을 진행했어요. 그런데 마침 저자의 한국 방문 일정이 잡혀 있어서, 그때에 맞춰 책을 내려고 번역과 편집을 아주 빠르게 진행했죠. 여행에서 마음에 들어 산 책이 제가 만드는 책이 된 거예요. 결과도 좋아서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았어요.
여행지에서 꼭 사 오는 것이 있나요
도쿄에 가면 넘버 슈가 캐러멜을 사요. 정말 맛있어요.
일본에서는 드럭스토어 화장품을 보는 편이에요. 시세이도의 이하다나 고세의 원 바이 고세처럼 제가 써보고 좋았던 제품들이 있어요. 가격에 비해 만족스럽다고 느꼈어요.
저는 백화점 식품관을 좋아해요. 파리에서는 봉마르쉐 식품관에 가고, 도쿄에서는 긴자 백화점들의 지하 식품관을 둘러봐요. 지역의 과자나 식재료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요. 그곳의 식문화를 잘 보여주는 소스나 향신료를 사 오기도 하고요.
영상에서 다 못한 이야기
박은성과 유상훈의 사전 답변에는 여행을 준비하고 기억하는 각자의 방식도 담겨 있다. 영상에서 길게 다루지 않은 이야기를 두 사람의 글에서 더 읽어본다.
여행 갈 때에도 책을 챙기나요
종이책은 가져가지 않아요. 장거리 비행을 할 때 아이패드에 교정 원고나 검토할 원고를 넣어두기는 해요. 하지만 현지에 도착하면 그것도 들여다보지 않아요. 제가 교정해야 할 대상인 한글에서 해방되고 싶거든요.
대신 현지 서점에는 가능하면 들러요. 어떤 작품과 작가가 그곳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현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책을 계속 읽는 것과 그 나라의 서점을 경험하는 건 제게 조금 다른 일이에요.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소비는 어떤 것인가요
일본의 한 브랜드 매장에서 우연히 오너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팬심이 더해져서 예정에 없던 물건까지 잔뜩 샀죠. 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소비에는 무엇을 샀는지만큼 어디서, 어떤 분위기 속에서 샀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시대마다 그 시절을 대변하는 편집매장이 있잖아요. 그런 곳이 가장 빛나던 때에 그 공간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고르는 경험이 기억에 남아요. 2010년대 파리의 콜레뜨나 메르씨가 그랬어요. 거기서 산 게 볼펜 한 자루라도, 물건에 그때의 분위기가 함께 남는 거죠.
나이가 들면서 여행 소비도 달라졌나요
쓸모는 없어도 아름다운 작은 기념품을 많이 샀는데, 이제는 덜 사요. 저는 컬렉터 기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대신 유용하면서 존재감이 있는 물건을 고르려고 해요. 가는 곳도 조금 달라졌어요. 힙하다는 곳보다 종교적인 장소나 장대한 자연,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처럼 오래 이름을 지켜온 곳들이 좋아지고 있어요.
저도 기념품을 사는 일은 줄었어요. 대신 현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공연을 보는 경험에 돈을 더 쓰고 있어요. 느긋하게 지내면서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거죠.
다음 여행에서는 무엇을 하고 싶나요
도쿄에 또 가고 싶어요. 김포에서 하네다로 가는 편리함을 알고 나니 더 자주 생각나요. 항공료만 비교하기보다 공항을 오가며 쓰는 시간과 수고까지 생각하게 돼요.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에도 돈을 쓸 수 있는 거죠.
호주 멜버른에서 호주 오픈을 직접 보고 싶어요. 좋아하는 테니스 선수인 조코비치의 경기도 보고 싶고요. 요즘은 테니스 메이저 대회를 현장에서 보는 일이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여행 경험 중 우선순위가 높아요.
저는 포틀랜드에 가서 NBA 경기를 보고 싶어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경기를 맨 앞자리에서 보는 게 꿈이에요. 멀리서 보는 것 말고 바로 앞에서 선수들을 보고 싶어요.
서로에게 여행지를 하나씩 권한다면요
상훈 님께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를 추천하고 싶어요. 사진이나 글,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번 권한 곳이에요. 거기서 여행을 끝내지 말고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내려오면 좋겠어요. 잉글랜드 북부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풍경을 보는 경험이 근사하거든요.
빽가 님께는 하와이 빅아일랜드의 마우나케아를 추천하고 싶어요. 원래 적어온 답이 있었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여기가 생각났어요. 별을 보러 갔을 때 풍경이 정말 좋았거든요. 저도 카메라를 가져갔는데 사진이 흔들려서 잘 담지 못했어요. 사진을 잘 찍는 빽가 님이라면 제가 못 담아온 모습을 멋지게 담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은성 님께는 원래 포틀랜드를 추천하려고 했는데 이미 다녀오셨더라고요. 그래서 키르기스스탄이요. 그 자연을 꼭 한번 보셨으면 좋겠어요.
여행 이야기는 목적지의 이름에서 시작해 그곳에서 보내고 싶은 시간으로 이어졌다. 같은 도시에 돌아가도 읽은 책과 살아온 경험만큼 풍경이 달라졌다. 쉬기 위해 떠난 여행이 새로운 일을 만나게 하기도 했다. 세 사람이 여행에 쓰는 돈에는 장소를 옮기는 비용뿐 아니라, 평소와 다른 상태로 지내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편집 안내
이 글은 「근로소비자」 5화의 영상 대화에 박은성·유상훈·빽가의 사전 답변을 더한 확장 인터뷰입니다. 본문 답변을 보강하고, 영상에 담기지 않은 별도 사례와 질문은 ‘영상에서 다 못한 이야기’에 모았습니다. 문장은 읽기 좋게 다듬었으며 실제 발언을 그대로 옮긴 속기록은 아닙니다.
채널 소개
「쓴만큼」은 돈과 시간을 쓴 만큼 그 사람이 보인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채널입니다. 첫 시리즈 「근로소비자」는 내가 벌어서 내가 쓰는 사람들의 소비와 삶을 이야기합니다.